여행과 산

서울 성곽-2. 역사속의 남한산성과 민중

초록숲12 2019. 4. 4. 21:07




  남한산성은 동문, 서문, 남문, 북문, 그리고 수많은 암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대는 장수들의 지휘소인데, 이 역시 동, 서, 남, 북장대 4개가 있었다   
 남한산성의 곡성이 북한산성보다 예쁘다

남문은 수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남한산성은 한양의 동쪽, 오늘날 서울, 성남시, 하남시, 광주군에 걸쳐 있다.
이런 위치에 있어서 조선시대에 수도의 동쪽 외곽을 경비하는 수어청이 설치된 것이다 

 남한산성의 암문은 북한산성과 달리 규모가 조그맣고 은밀하게 설치된 곳들이 많았다

 
국경 변방의 군사나 수도권을 지키는 5군영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정묘호란때는 20일만에 황해도까지 밀어 닥쳤고, 병자호란때도 보름만에 홍타이지(청 태종)가 직접 개성까지 순식간에 쳐들어 왔다. 

시대착오적인 수구세력의 반정 자체에서부터 문제는 시작되었다.
반정세력 서인들은 대외적 힘의 변화를 인지한 광해군의 적절한 줄타기 외교를 오랑캐에 목을 수그리는 굴욕적 태도로 비웃고, 외부의 상황은 변했는데도 뼈속까지 배어있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를 견지한 채 조선의 물리력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다.
20만명의 적이 포위한 상황에서도 산성 안에서는 주전론자와 주화론자로 나뉘어 계속 싸웠고 인조는 갈팡질팡했다.
인조와 사대부들은 반정직후 반정의 주요 일원인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바로 공주로 도망한 경력과 정묘호란때는 강화도로 도망간 경력이 있었다.
조선은 남풍이 불면 의주로, 북풍이 불면 강화도라는 과거부터의 공식이 있었는데 인조는 재빨리 이를 따르려 했으나 왕의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뒤를 따라 가려다 이미 청이 홍제원(오늘날 홍제동에 있던 중국 사신 접대처)까지 도달하였다는 소식에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것이다.
1만명이 겨우 두달 먹을 식량밖에 없는 남한산성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두 세력간의 싸움은 치열했고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결론은 강화도의 함락 소식에따라 내려졌다.
결국 인조는 자기 가족의 안위가 최우선이었다.
그 결과 국토는 유린당하고 전란의 피해는 막심했다. 백성들 50만명이 청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사대근성 때문에 청에서 갖은 고생끝에 돌아온 부녀자들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감도 느끼지 않고 화냥년(還鄕女), 그 자식들을 후레자식(胡虜자식)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에도 사대부들은 힘의 변화를 받아들여 체제 개혁에 나서지 않고 오히려 더욱 수구적인 자세로 변화하여 명이 사라졌으니 이제 조선만이 유일하게 남은 중화세계라는 소중화주의, 유교적 질서의 사대부 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수어장대 지나 서문을 향하는 곡성



城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뛰어난 방어 수단이었다. 守城은 攻城보다 용이했다.
동로마제국이 강성한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견딜 수 있었던 것도 훌륭한 콘스탄티노플성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5세기 말 프랑스의 이태리 침공시 이동식 대포가 처음 등장하면서 이태리의 성들은 유명무실하게 깨져나갔다. 청도 병자호란 이 시기에 포르투칼로부터 대포를 얻었다. 요동반도에서 명에 대해 사용하고 큰 효과를 보았다.
조선은 강화도가 고려말 40년간 피할 수 있었던 섬이라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원은 중국에서 바다처럼 넢은 강과 호수 그리고 해남도등을 건너 싸웠던 경험이 있었지만, 고려의 조정이 큰 위협이 안되서 방치한 것일뿐이었고, 청 역시 좁은 바다를 건널 능력이 없지 않았다. 
청은 강화도 건너편에서 대포를 날렸고 해변의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청군은 유유히 섬에 상륙하고 살육과 강간을 자행하고 당진쪽으로 급히 피한 원손등을 제외한 봉림대군(효종)을 포함한 왕족들을 잡아갔다   
  
남한산성에는 조그만 옹성까지 포함해서 옹성들이 많다.
옹성은 성 밖의 지대가 높아서 적의 침입이 용이할 때 그 곳에 성을 쌓아서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임란때도 국방력에 대한 무관심으로 관군의 숫자는 얼마 안됐고 그들이 계속 패배하면서 오직 승군과 의병만이 싸움의 주체였다.
첫 승리인 청주성 전투도 승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으며 칠백의총으로 유명한 금산전투에서도 승군은 천여명이 전사했다. 그래서 한국 불교를 호국불교라고 한다.
그후 인조와 조선의 지배계급은 임란으로 인한 국토 유린의 경험을 잊고 군사력 증강에 소홀히 하고 대외 정세 변화에 부응하지 않은 채 명에 대한 절대적 사대주의에 매달려 3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정묘호란과 다시 병자호란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  

 다시 능선 위로 성곽은 이어진다

곡성의 연속이다   

일부 구간은 높은 지대에 있어 성을 쌓지 않고 여장(女墻)만으로 축성되어 있다

또한 병자호란과 이후의 시기에 인조반정 주역들의 삶의 궤적에서 반정세력들의 특성이 드러난다.
반정 최고 공신 김류의 외아들인 김경징은 강화 방어의 임무를 방기하고 청이 염하를 못건넌다며 술만 마시고 놀다가 청이 들이닥치자 왕족을 놔두고 나룻배를 타고 내뺐다가 훗날 사약을 받았고, 그의 아들 김진표 역시 '죽지 않으면 장차 욕을 볼 것'이라며 할머니, 어머니, 부인, 할아버지 첩, 아버지 첩등에게 자결을 요구하여 죽게 하고 본인만 살아 남는다.
무력을 동원했던 반정공신 이괄은 공훈 분배과정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불만과 아들이 역모혐의까지 받자 전두환, 노태우등의 1979년 12.12사태처럼 전방병력을 빼서 다시 1만명의 반란군으로 평안도의 군대를 이끌고 한양을 점령했다가 패퇴했다.
병자호란이후에도 김자점은 병조판서로 병권을 장악하고 손자를 왕실에 혼인시켜 외척으로 권세를 누리다가 인조사후 효종때 실각하자 청나라에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밀고하였으나 사태가 수습된 후 처형당한다.
그리고 김상헌의 후손들은 선조의 후광을 입어 훗날 장동 김씨(안동 김씨)로 권세를 떨치다가 세도정치로 조선 후기를 어지렵히며 조선의 패망을 가속화한다
  
과거의 여장과 근래 새로 쌓은 여장이 비교된다  
여장은 성곽위에 낮게 쌓은 담인데,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 모두
구조가 같다. 가운데 근총안, 좌우에 원총안,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거나 가까이 접근한 적에게 창이나 돌을 던지기 위한 타구로 구성되어 있다

벌봉쪽으로 이어진 옹성

이 구간의 옹성 역시 근래의 옹성이 아니다. 이 지역은 병자호란 당시 옹성이 없어서 청이 건너편 높은 지대에서 쏜 대포로 피해가 극심해 전란이후 옹성을 새로 쌓았다.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낼 때 뭉쳤던 서인은 인조반정이후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두파로 나뉘었다. 친청파와 반청파. 최명길이 죽고 김자점등을 처형하면서 반청파는 북벌을 계획한다.
효종과 그들이 북벌을 위해 한 일은 남한산성의 방어 강화, 중앙군의 기병화, 어영청의 군사 3배 증가, 북쪽 변방의 성 개축과 농민들의 군사훈련이었다.
북벌론자들은 수도를 오래 방어하고 남한산성에 피신했을 때 오래 버티는 것을 북벌로 착각한 듯 싶다.
그마저도 효종이 죽자 북벌 계획은 없던 일로 사라지고, 대신에 성리학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조선만이 중화세계라는 소중화주의를 가속화한다.
그리고 효종의 죽음은 바로 장례예절, 즉 복상기간을 얼마동안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로 새로 대두한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서인과 그동안 소외되었던 남인간에 禮訟論爭으로 이어져 피를 부르는 당파싸움이 시작된다

 이곳 역시 옹성이 보인다

병자호란이후 시대착오적인 사대부들은 숙종때는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서인과 허목을 중심으로한 남인간에 치열한 당쟁으로 일관해 3번의 정치적 지형을 바꾸는 환국(換局)이 이루어지며 송시열 본인도 사약을 받는 대규모 피를 부른다.
그리고 영조 즉위과정에서도 서인내에서 또 다시 분화된 파벌인 노론과 소론간에 열심히 싸우더니 영조때는 노론내부에서 오랑캐(청)를 사람으로 봐야하냐 아니냐는 호락논쟁(湖洛論爭)이 벌어진다.
즉 시대착오적인 성리학의 자기 중심적인 소중화주의에 집권 사대부들이 집단적으로 미쳐갔다.
단지 윤리학일뿐 철학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성리학의 썩은 줄을 움켜잡고, 중화에 대한 뼈속 깊이 밴 사대주의와 백성들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이 그들의 땀과 희생위에 군림한 시대에 철저히 뒤떨어진 조선의 지배자들. 그들은 거대한 괴물이었다.

지형을 따라 굽이치는 곡성
옛날의 여장은 전돌과 석회로 쌓는 것이 축성의 기본이다 

    
 건너편에 산이 있어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총 또는 무기로 대응하기 위한 초소같다. 지형을 고려해서인지 이 지역에만 보인다.
그런데 남한산성에는 북한산성에는 곳곳에 있는 병사들의 막사 역할을 하는 성랑(城廊)이 안보인다.
그래서 병자호란때 수많은 병사들이 한 겨울에 경비를 서면서 눈과 비에 추워서 오들오들 떨며 괴로워 했고 수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린 것이다
   
동문으로 향하는 성곽길
건너편에 동문에서 남문으로 가는 산 허리와 성곽이 보인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왕의 성터였다고도 하는데 확인할 수 없다.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침공을 막은 후 오히려 북상하여 평양성(압록강 부근으로 추정)을 함락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후 귀환하여 고구려의 보복에 대비하여 평지의 도성을 버리고 이 곳에 산성을 쌓고 수도로 삼았다.
이후 7세기에 문무왕이 이 곳에 성을 쌓았는데 백제의 성을 토대로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정묘호란 직전인 조선의 인조때(1624년부터 1926년까지) 성을 축성하였고, 순조때까지 성내의 시설을 확장 하였다.
북한산성 축성때처럼 남한산성의 축성은 8도의 승군들을 동원하여 승려들의 부역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축성과 방어를 위하여 기존의 2개 절외에 7개의 절이 만들어져 현재는 장경사만이 남아 있다.
사대부들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승려들은 八賤民 중의 하나로 취급받고 도성 출입 금지, 부녀자의 기도를 위한 사찰 출입 금지, 일상적인 군사훈련과 온갖 부역의 동원, 품삯이나 식량조차 공급 받지 못한 채 종이와 두부, 목공예품의 생산을 강요 당하고 양반들의 산 유람때도 시달리는 등 오직 억압에 시달렸는데, 이런 축성이나 능(陵)의 조성에 동원되고 승병으로 부역과 군역을 강요받았다

 정묘호란때는 열심히 싸운 천민들에게 免賤의 특혜를 주어서 천민들은 열심히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후에 특혜를 없애버렸다. 그래서 천민들은 양반 사대부들만이 배불리 먹고 사는 세상 조선을 위해서 목숨바쳐 싸울 의욕이 없었던 것이고 병자호란때는 전투 참여율이 저조했다  

성과 여장의 구조를 잘 보여주는 구간

승려 覺性은 임란때 해전에 참여하였는데 남한산성의 축성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축성의 책임자로 3년만에 축성하였다.
그리고 병자호란때 승려 3천명을 모아서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고 북상하던 중 항복의 소식에 지리산으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