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은 삼국시대때는 주로 부아악(負兒岳), 고려때는 삼각산, 조선때부터 북한산으로 불렸다.
그리고 조선때 북한산과 관련된 글은 성호 이익의 유북한기, 도총섭을 지낸 聖能스님의 北漢誌외에 산행기도 조선 후기 이덕무, 유광천, 신명현등의 기행문, 이옥의 重興遊記와 몇사람의 간단한 글들이 있는데 이 중 몇편을 보았다.
일제때는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의 북한산성 보고서가 있다고 하며, 근래에는 북한산에 관한 책들도 약간 나오고, 최근의 山 잡지에서는 이옥이 돌아다닌 길을 따라 걸으며 그의 생각을 이야기한 글도 두편 보았다.
그런데 조선을 중심으로한 역사속에서 북한산과 산성, 그 당시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글들이 유교적 지식인의 시각에서만 쓰여졌고, 산속에서 살아간 민초들이나 스님들의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는 글들은 못봤다.
의상능선에서 바라본 원효봉, 염초봉, 백운대, 노적봉, 백운대
의상능선 뒷쪽의 풍경. 승가봉능선, 사모바위와 응봉능선, 비봉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북한산
고구려가 건국한 동명성왕때 왕자 유리의 등장으로 비류와 온조가 그들의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남으로 내려오게 됐고, 한강 하류 오늘날 서울지역에 이르러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큰 강이 있는 이 지역을 택하여 나라를 세웠는데(비류는 미추홀 오늘날 인천에 갔다가 다시 합류) 일부 글에서는 이 지역이 북한산 지역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지역은 아차산 지역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삼국시대때 서울 주변 지역은 백제가 고구려, 신라와 접경하여 각축한 지역인데, 역사속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백제가 개류왕때 한수 이북에 성을 쌓았다는 것과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한 뒤 한강 이북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 개로왕이 성을 쌓았다는 기록등인데, 아직까지 그곳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아 그곳이 북한산성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공동으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나제동맹을 배신하고 한강 유역을 기습 점령한 신라의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가 북한산 비봉에 있고,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포위해서 공방전을 벌였다는 기록은 당시 북한산에 산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때는 북한산에 마애불이 꽤 조성되었고, 승가사 석굴은 고려 왕조의 불교 성지였다. 석굴안에 僧伽大師의 불상이 조성된 이후에는 여러 왕과 귀족들이 북한산을 찾아서 재를 올렸고, 대각국사 義天과 형인 숙종이 같이 방문하여 재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현종이 즉위전 대량원군시절 이모인 천추태후의 견제 때문에 강제로 승려가 되어 신혈사(지금의 진관사)에 유폐된 사실이 있는데, 후일 왕이 되자 진관사와 승가사등을 크게 중수하였다.
그리고 현종은 거란, 즉 요와의 2차 전쟁때의 개경의 점령과 나주까지의 도망, 대규모 국토 유린의 피해등의 경험으로 인해 중앙 군을 무리할 정도로 증가시키고 송악산에 새로 산성까지 건설했지만, 3차 전쟁때는 거란 군이 계속 남진하여 개경에 가까워지자 성밖에 민호를 전부 성안으로 불러들인 청야전술과 도성의 방비를 엄격하게 하면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태조 왕건의 梓宮(관)을 북한산 香林寺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아울러 1232년 고종때 고려 군은 이곳에서 몽골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1387년 우왕때 산성을 고쳐 쌓았고, 그밖에 최영장군이 북한산에 있는 중흥산성에 주둔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중흥산성의 정확한 위치는 지금까지도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북한성도
북한산성과 주변 지형,그 안의 사찰이나 성문, 장대등의 위치와 명칭등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의 북한산성
북한산성은 역시 한양을 도성으로 한 조선시대에 와서야 필요성이 중시된다.
그러나 도성이 태종때 흙으로 축성되고 세종때 돌로, 숙종때 네모난 돌로 제대로 축성, 후에 순조때 다시 보수되었지만, 조선시대에 북한산성은 문종때부터 산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1711년 숙종때 처음 축성되었다.
그동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도성과 연결되는 배후 산성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도성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 방어 전선이 커져 부담이 된다는 주장, 당시 심각한 경제적 피폐와 그로인한 흉흉한 민심 해결이 우선이라는 주장등 북한산성의 축성과 관련해 무려 37년간 오랜 논쟁이 이어졌는데 막상 축성은 불과 6개월만에 이루어졌다.
숙종은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북한산성을 건설하고 그 안에 행궁, 관청, 군사시설, 우물, 저수지, 창고, 승병을 위한 사찰등을 대대적으로 만들어 산속 도시를 건설했다.
짧은 기간에 완성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전의 도성 축성공사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조직적으로 축성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군문의 병사들과 승려등이 주로 건설에 동원되었다. 산성은 총 12.7키로의 길이인데 대서문, 북문등 성문 13개와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등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산성 안에는 승군이 머물도록 사찰은 중흥사를 비롯한 13개의 절을 두었다.
현재 산성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 흙으로 쌓은 성벽이 약간 남아 있고, 숙종때 쌓은 성벽은 낮은 여장(女墻)이 무너진 채 남아 있으며, 성문들과 행궁터(1915년 대홍수로 파괴), 창고터등의 건물터, 우물터등이 남아 있다.
조선의 사회구조와 민중들의 삶
그러면 당시 조선의 사회 상황, 즉 조선은 어떤 구조의 사회이고 민중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조선은 상국인 중국(한족)을 뼛속까지 사대하면서 아울러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내세운 철저한 계급국가였다.
그래서 오직 외눈박이인 사대부들은 유교 이외의 어떤 철학이나 종교도 철저히 탄압하였다. 철저한 계급적 구조의 유지, 양민에 대한 과도한 경제적 수탈과 노예에 대한 지독한 착취를 물적 토대로 한 사회였다.
즉 조선의 사대부들은 불교를 숭앙하던 고려와 달리 려말에 성리학이 도입된 후 유일사상처럼 오직 유교만을 숭앙하고 불교를 배척하였는데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세조를 지나 중종때 부터는 불교에 대해 극심한 탄압을 가한다.
그리고 양반 사대부들은 유교의 禮와 秩序를 내세우며 中人, 良民, 그리고 노비등의 八賤 위에 군림하였다.
성리학은 신분제를 우주의 질서가 반영된 것으로 여기는데, 조선에서 양반들은 유교 경전을 연구하고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 사회질서의 유지 및 관리를 자임하면서 이들은 육체적 노동에서 해방되어 공맹을 놓하고, 주자 왈 하며 등 따시고 배 부르게 지내기 위해 양민과 노비들을 통제, 억압한다.
양민들(평민, 주로 농업에 종사)은 노동을 통해 생산물과 노역을 租庸調라는 세금의 명목으로 바치는 역할을 담당해서 허리가 휘게 된다.
온갖 명분의 세금과 군역, 공사에 동원되는 부역은 오직 이들 계급만이 담당해 과도한 수탈에 시달렸다.
그로인해 일부 양민들과 일부 노비들은 흉년이 들면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고향을 떠나 산속 화전민과 대규모 유랑자집단, 그리고 도적, 해적의 무리가 되었고, 결국 사회 불안 요인이 되어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다.
특히 노비들의 경우, 신체적 제약과 가혹한 노동, 노예의 세습화, 빈곤, 억눌려 지내고 매질과 심지어 금지되 있지만 드물게 살인까지 당하던 극도로 열악한 처지였다.
노비제도의 경우는 고려때는 원나라조차 비판했던 동족을 노예로 삼는 방식(원나라는 타 민족 포로와 범죄자를 노예로 삼았다)이어서 시정을 권고 받았으나 고쳐지지 않았는데, 조선에서도 그들 사대부들이 마음 깊이 진정으로 떠받든 상국인 명나라에도 없는 세습제를 유지해서 명으로부터 조롱을 받았다.
즉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라 '동방노예지국'이었다.
그래서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복수심에 불탄 일부 노예들은 주인 양반들을 죽이기 위한 '검계' '살주계'까지 조직한다.
그리고 경제적 피폐는 群盜 형성의 주요 원인이 되었는데, 조선 전기에는 1489년 김막동집단이 평안도를 중심으로 7년간, 1500년경 연산군때 홍길동이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북부의 넓은 지역에서, 1530년경에는 순석집단이 전라, 충청, 경기 3도에 걸쳐 활동하고 체포 인원만 170여명으로 대규모 였다. 명종때는 유명한 임꺽정집단이 출현했다.
조선 후기에는 숙종때의 장길산집단, 그리고 숙종, 영조때 많이 등장하고 철종, 고종때까지 실록에 기록도 많은 明火賊은 수백명이 말을 타고 포(총을 말함)를 쏘며 대지주 양반집이나 심지어 관청까지 공격하며, 고종때도 활빈당이 자주 출몰한다.
그밖에 水賊(해적)의 활동이 문제가 되면서 성종때 실록에서 이미 오래 되었다는 언급이 있는데, 가혹한 세금과 부역을 피해 도망친 백성들과 변방으로 강제 이주당한 백성들, 지나친 수탈에 도망친 어민들, 범죄자들로 구성된 빈민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조선 후기 내내 섬과 해안지역에서 도둑질을 자행했다.
어민의 수적화에는 어민에 대한 혹독한 조세와 특산물이라는 공물의 부담, 일부 양반 권력자들의 어장의 사유화, 가령 치열하게 당쟁에 집착했던 윤선도로 대표되는 해남 윤씨 가문의 맹골도 점유(세월호 침몰지역)처럼 권력자들의 개간이나 어장 신설을 이유로 어장 점유, 궁방과 아문들의 어전과 염분 점유등도 주요한 원인이었다.
즉 조선은 양반 사대부들의 억압과 착취에 민초들은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되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사회였다.
그리고 승려는 노비, 백정, 상여꾼, 무당, 기생, 광대, 공장(장인)등과 더불어 8 賤民 에 속했고, 사찰의 재건은 전국적으로 금지되었고 젊은 승려들은 새로이 군역을 부담해야 했다.
세조때 창건한 도성 안의 원각사(오늘날 파고다공원 자리)는 연산군때 전국에서 차출된 1300명의 대규모 기생들의 합숙소가 되면서 승려들이 절에서 쫓겨나고, 중종때는 아예 헐려서 그곳에서 나온 목재들로 선박을 건조했으며 그후 사대문 안에 절이 세워지지 못하게 되었다.
누란의 위기에서 조선의 불교
하지만, 임진왜란때 조선은 군사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아 일본에 맞서 연전연패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결국 일본과 싸운 사람들은 스님들(승병)과 의병들이었다.
임란 최초의 승리인 청주성전투와 평양성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 그리고 비참한 패배를 당한 금산전투등에서 승병들은 애국적이었다. 그래서 우리 나라 불교를 호국 불교라고 부르는 이유도 외침에서의 역할이 막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불교에 대한 평가와 달리 조선의 지배자들은 계속 불교에 대해 폄하하고 이율배반적이었다.
청주성전투의 승리 직후 승려 영규와 승병들에 대한 칭송은 곧바로 바뀌어 영규를 의병장 조헌의 부하처럼 묘사하고 조헌에 대한 칭송으로 변화시켰고, 금산전투에서는 싸우다 전사했는데도 상투머리의 시신만 거두어 수습하고 맨머리의 승려 시신은 수습하지 않고 버려두는 차별과 모욕을 행하였다.
즉 의병들의 장렬한 죽음을 추모하는 '칠백의총'은 승병과 의병들의 '천칠백의총'이 되었어야 했다.
임란때 서산대사가 전투를 지휘하면서 말위에 올라탄 모습을 본 사대부들이 못마땅하게 보는 장면의 글도 있다.
임란이후 선조의 전쟁기간의 공훈 평가때는 더 가관이었다.
일등 공훈자들인 '호성공신'에는 적군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아니라 선조를 의주까지 무사히 도망치게 하는데 일조한 문신과 선조의 시중을 들고 발을 닦아준 내시등 86명, 그리고 '선무공신'에는 이순신, 김시민등 주로 전사한 무신과 의병장 18명만이 책봉되었고, 장렬하게 전사한 많은 의병장들, 승장들은 공신 명단에도 오르지 못했다.
다시 불교를 이용하다
그런데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던 조선이 왜 산성 안에 새로 절들을 짓고 승려들을 대거 이주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유학자 사대부들은 이제 다시 그들이 억압하던 승려들을 이용하려고 북한산성 속에 13개의 절을 두었다. 산성의 축성에 동원하여 아무런 지원도 없이 부리다가 산성의 완성이후에는 다시 산성의 방어와 관리를 담당하게 하려는 얄팍한 이기적인 속셈 때문이었다.
조정은 국경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의 승려들을 1년에 6차례씩 교대로 선발해 350명의 승병을 산성에 나눠 주둔시키더니 나중에는 직업군인처럼 상주하게 하여 스님들은 수도승이자 군인이었다.승영사찰은 법당과 무기와 군량미등을 보관하는 군사시설로 나뉘어 있었는데 절 마당은 군사훈련장이고, 법당보다 군사훈련을 지휘하는 누각이 더 커서 병영이 우선시 되었다.그런데 승병들을 먹이고 유지하는 비용을 국가가 지급하지 않고 절에서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방관한 채, 산성의 수비 및 관리외에 절에서 종이 제조와 목공예, 두부등의 생산을 시키고, 건축공사와 능묘나 제방 공사등의 요역에 동원해서 사찰들은 큰 어려움에 빠져 있다가 1894년 갑오경장때 승병은 마침내 해체되었다.
그런데 임란이후에도 스님들은 엄청난 노역과 사대부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그들 중의 일부는 결국 배고픔 때문에 생존을 위해 사당패가 되고, 일부는 심지어 群盜의 무리가 되기도 한다.
조선 초부터 성리학자들은 불교를 이단시해서 승려를 무당과 동일시 하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고 스님들을 절에서 내쫓아 수효를 반 이상으로 줄였고, 스님들의 도성 출입금지, 신자인 부녀자들의 사찰참배 금지, 왕족들의 사냥시 몰이꾼으로 동원, 산성 건설이나 각종 건설현장에 동원해서는 일반 백성과 달리 삯을 주지 않아 굶주리거나 구걸해서 먹게 했다.
당시 별미였던 두부를 먹기 위해 양반들은 절에 가서 포회(泡會)라는 두부잔치를 벌여서 두부를 만들게 하고 닭과 물고기도 잡게 했다.
명종때 양사언에게서 시작된 산 경치 유람때는 말과 나귀 대신에 양반들의 가마를 메고 가파른 산과 계곡을 열악한 짚신의 발에 피가 터지며 동원되어야 했다. 그래서 스님들은 인근에 양반이 보인다는 소리만 들으며 절을 두고 도망을 치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각종 요역에 시달리고도 굶주리던 스님들 중 일부는 절을 나와 몇명씩 모여 유랑하는 사당패가 되거나 도적의 무리들의 연락을 도와주기도 했는데, 그들 스스로가 모여 당취(黨聚)가 되기도 했다. 후일 땡추로 불리기도 하는 당취는 무시무시한 규율을 가진 금강산 당취와 지리산 당취가 유명하다.
이들은 조선 체제를 부정하는 반체제적 승려집단으로 산적패의 통신망 역할이나 민중 교화만이 아닌 민중 구제라는 명분으로 산적질도 한다.
도성연융북한합도 한양도성과 연융대성, 북한산성을 합해서 그린 지도
탕춘대성과 平倉
연산군의 놀이터였던 蕩春臺에서 명칭을 딴 탕춘대성에서 영조때 지도에 보이는 군사훈련장인 연융대가 들어서면서 탕춘대성이 鍊戎大城으로 한때 명칭이 바뀌었다.
탕춘대성은 숙종때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에 새로 축성되었는데, 탕춘대성과 나란히 보현봉에서 형제봉을 거쳐 북악산을 잇는 성곽도 추진했으나 숙종이 사망으로 건설되지 못했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해서 도성에서 안전하게 산성으로 피난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한정된 군사력으로 방어력이 분산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논란이 있었다.
전쟁을 대비한 식량과 전쟁물자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는 산성 안에도 여럿 건설되었지만, 전쟁이전 평시에 대비하기 위한 대형 창고는 도성과 산성 사이의 평지에 건설해두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지금의 평창동 지역에 군량창고인 평창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이미 그곳에는 선혜청 창고와 총융청 기지도 있었다.
산성코스를 오르면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14성문 중의 첫번째인 과거 水門 터
계곡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큰 물에 휩쓸려 없어진 듯하다.
重城과 中城門
숙종이 축성이 끝난 후에 대서문으로 들어와서 시단봉과 동장대에 올라서 보니 서쪽이 지형적으로 낮아 대서문만으로는 취약하니 다시 내성을 축성하라는 지시로 水門과 함께 건설되었다.
물이 흘러내리는 구멍인 용머리 누혈(漏穴)이 인상적이다.
북한산성에는 그때 숙종과 어린 영조(연잉군)가 같이 왔으며, 후에 다시 영조, 사도세자, 정조등이 다녀갔다.
성호 이익은 관직에 진출하지도 않고 후대의 교육에만 종사하던 실학자였지만, 북한산성을 축성하기 몇해 전 그리고 축성 직후 산성을 세밀히 살펴보고 간다.
즉 조선의 모든 양반들은 유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곧 관료로 출세하기 위한 목적이어서 유학자는 곧 사대부를 의미했다. 그러나 역시 율곡 이이와 더불어 노비의 해방을 유일하게 주장하고 관직에 연연하지도 않은 채 저술 활동과 후학 양성에만 매진한 조선 최고의 선비 이익이 진정 나라를 걱정하는 모습이다.
노적사 입구에 있는 표지판
행궁내에 위치했던 여러 기구들의 위치를 알려준다
이 앞을 지날 때마다 궁금했던 사찰 이름. 왜 하필 鎭國寺(후에 노적사로 명칭 변경) 일까?
부근의 태고사 주지스님께 여쭤봤더니 과거 고려시대때 도읍지 개성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면 너무 산 형태가 날카로워서 그 기운을 조금이라도 눌러주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라는데, 鎭護, 鎭山이라는 단어와 관련있는 듯 하다. 나라를 지킨다? 보호한다?
산영루
산 그림자라는 이름처럼 어둠이 내릴 때의 경치가 좋다고 한다.
율곡 이이와 더불어 성호 이익, 그리고 정약용이 형 약전과 함께 놀러와서 시를 지었고, 추사등 여러 양반들이 놀러왔던 곳이다.
북한산성에 놀러온 양반네들은 산성에서 가장 큰 절인 중흥사에서 주로 숙식을 했으니 바로 옆인 이 누각에서 당연히 놀았을 것이다.
총융청에서 관리했는데 1925년 대홍수때 유실되었다가 근래에 복원되었다.
비석거리
산영루앞에 있는데, 조선 5군영 중의 하나이며 수도의 서북쪽 경비를 담당한 總戎廳의 總戎使의 업적을 주로 기리는 비석들과 산성의 관리를 담당한 經理使의 비석들이 있다.
북한산성은 총융청, 남한산성은 수어청, 도성은 나머지 三軍門 관할이다.
산영루 앞에 있는데, 조선 5군영 중의 하나이며 수도의 서북쪽 경비를 담당한 總戎廳의 總戎使의 업적을 주로 기리는 비석들과 산성의 관리를 담당한 經理使의 비석들이 있다.
민영준. 민비의 조카, 후일 민영휘로 개명한 최악의 친일 인사이자 조선의 멸망 공간에서 최고 부자였고 휘문고를 설립한 이 자의 비석도 보인다
앞은 북장대능선과 기린봉, 노적봉, 뒤에 보이는 능선은 원효봉과 염초봉, 파랑새능선의 뾰족 솟은 장군봉과 백운대 자락
중흥사
중흥사의 규모는 아주 컸다. 고려 전기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고려 말 보우스님이 중창했다고 하며, 북한지에 따르면 30칸 정도의 작은 절이었으나 북한산성 완공후 산성 안의 모든 절을 지휘하고 전국의 승병을 총괄 지휘하는 도총섭이 거주하는 136칸의 큰 사찰로 변했다. 북한산을 유람하는 양반 유학자들은 절에서 숙식을 해결했는데, 산성 안의 11개 절 특히 중앙에 위치하고 규모가 큰 중흥사에 주로 머물렀다.
정철, 이항복, 이덕무, 정약용, 김정희등도 들렸고, 어머니의 죽음 뒤 인생무상을 느껴 김시습은 중흥사에 머물면서 불교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런데 이옥 같은 경우, 자신의 자유분방한 글 스타일 때문에 정조때 문체반정으로 과거에 응시를 못한 양반이었는데 2박3일간의 북한산 유람기인 중흥유기에서 어느 절에는 경전조차 없다는 등 비판하면서, 상원사에서는 술이 없다고 스님에게 술 사오라고 시키는 오만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 중기이후 위정자들이 경전 출판이나 불교 수행을 허용하기는 했나..
조선 초부터 성리학자들은 불교를 탄압해서 불살생 계율의 사찰이 백정과 도살장을 관리케 해 능멸하고, 각종 공사에 요역으로 동원하였고, 주로 중기이후에는 양반들이 산에서 노는 풍습이 퍼지면서 산에 놀러와서 스님들에게 두부, 물고기등의 안주를 만들어 내라고 괴롭히거나 사찰을 기생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는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다
산성안 중창지(中倉址) 자리 표시
산성 안에 두었던 7개 창고들 중의 하나. 식량과 무기를 보관하였다.
특이한 점은 도성의 서북지역은 총융청 관할인데, 도성의 경비를 담당하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삼군문도 산성 안의 시설을 나눠서 관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태고사
근래에 만든 태고사 요사채. 태고사는 중흥사의 부속 암자로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대사가 창건해 태고암이라 하였다. 행궁과 중흥사등을 쓸어가버린 1915년 대홍수와 6.25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고, 보우스님을 태고종은 종조로 섬긴다.
원증국사탑비
비문은 목은 이색이명필 권주가 썼고 우왕때 건립되었다. 고려말 공민왕때 국사를 지내다가 신돈에게 밀렸다가 후에 다시 국사 직을 제의받았지만 거절하였고, 이 절에서 입적했다.
보우대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려말에서 조선 초로의 이행기인 혼란의 시기였는데, 신진사대부들과 친원파간에 치열한 세력다툼이 일어나던 시기이다.
당시 세력가들인 이색이 비문을 짓고 비문의 행적에 최영, 이성계등이 제자로 언급되는 것을 봐도 당시 보우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원증국사 부도
뒷편이 원증국사 부도, 앞은 법운 대종사 부도
노적봉 뒤로 백운대, 인수봉과 백운대. 삼각산
거북바위
태고사 뒤로 오르다가 만난다. 뒤로는 봉성암.
보우스님께서 좌선 수도하셨다는 곳으로 태고대, 천해대라고도 불린다.
거북바위에서 바라 본 의상능선과 남장대능선
동장대
3개의 장대 중 하나. 전망을 살피고 장수가 지휘하는 곳
대동문
부왕사지
북한산성 내에 있는 승영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전국에서 승병이 동원되었는데 이때 승병이 머물 사찰 11곳과 암자 2곳을 신축하거나 개축했다. 산성이 완성된 후에는 산성의 수비를 담당했다. 승영 사찰에는 법당과 같은 신앙공간도 있었지만, 무기고와 군량창고 같은 군사시설이 더 중시되었으며, 승영 사찰은 갑오개혁때(1894년) 승병이 강제로 해산되어 쇠락해졌으며 한국전쟁때 대부분 파괴되었다. 유사시에 인근 행궁의 수비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안내 표지판 참조)
부왕동 암문 근처에 있는 원각사지.
원각사지 역시
승영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인근의 부왕동 암문의 수비와 관리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너진 채 남아 있는 산성의 여장. 총안의 구조는 남아 있다
부왕동 암문 부근에 새로 복구된 산성
여장(女墻)의 구조
여장의 구조. 숙종때부터 총을 사용하기 위한 근총안과 원총안, 화살을 쏘기 위한 타구를 만들었다. 홍예문을 만드는 방식도 알 수 있다(한양도성박물관의 사진)
근대이전에는 성이 가장 주요한 방어수단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사에서 성의 역할은 막중했는데, 1494년 프랑스 샤를 8세의 이태리 침공시 이동식 대포가 처음 등장(전쟁사에서 이 사건은 중요한 변화)하면서 성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전까지는 성을 둘러싼 공방전이 동서양 모두 중요해서 로마군이 게르만과의 갈리아지역 전투나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수성이 동로마의 수명을 연장시켰고, 우리의 역사에서도 고구려와 수당의 싸움에서 수성이 왕조를 연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15세기 말이후 시작된 대항해시대에 영국에서 비롯된 대포를 장착한 함선(이 점 역시 전쟁사에서 중요한 변화로 규정)은 괭장히 위력적이어서 동양 정벌의 선봉이 되었다
성랑지(城廊址)
성곽에 딸린 초소 건물이자 병사들의 숙소였던 성랑이 있던 곳이다. 북한산성에는 성랑이 143개소가 있었다
험한 봉우리들에도 산성이 있지만, 험해서 그 자체로도 산성의 역할을 했다
의상능선의 暗門
산성에는 여러 개의 비밀스런 암문을 두었다
탕춘대능선과 암문
향노봉 부처님, 와불
자주 오르는 오산 슬랩
오산슬랩 위 끝에 쌓고 있는 돌탑
산에서 만나 종종 같이 산을 타는 지인이 쌓는 탑. 바람이 심한 곳이라 무너지고 쌓고 반복하면서 2년째 밑에서부터 10키로그램이 넘는 돌을 주워서 하루에 대여섯번씩 슬랩을 오르고 내리며 더욱 단단히 쌓아 나가고 있다. 가끔 이 주변에 앉아 산을 바라보며 이 친구가 20분 정도 암송하는 불경을 듣는다.
향노봉 정상부
향노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비봉 줄기와 문수봉, 보현봉 사자능선.
북한산은 봉우리 명칭들을 생각해보면 불국토이다. 그리고 대남문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문수봉과 보현봉은 마치 협시 보살의 형태이다.
승가능선, 의상능선, 그 뒤로 백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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