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

중국 중원의 산과 사람들 -5. 하남성 박물관 / 정주

초록숲12 2018. 11. 17. 14:07

 

하남성 박물관

 

볼 것이 많은 박물관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고대 인류 유물과 고대 동양 문명 또는 중국 문명을 보는 다양한 유물들이 있었다. 참 부럽기도 하고. 하지만 충분히 볼 시간이 부족했다.

다음에는 일부러 고대 문명 발상지인 하남성과 바로 옆의 역대 왕조들의 수도로 유명한 섬서성 서안(장안)의 유적지들과 박물관들만을 보러와도 좋을 것 같다

 

 

南召猿人 치아 뼈

 

북경원인과 비슷한 시기인 약 40-50만년전의 구석기 초기의 인류. 하남성 남소현에서 발견되었다.

이 시대이면 자바원인, 북경원인, 하이델베르크인들과 같이 아프리카에서 유럽까지 퍼진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될 것 같다.

중국에는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인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남방원인(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에렉투스로 진화하는 과도기적 특징을 보여주는 약 170만년전으로 측정된 원모인(元謀人)의 치아가 운남성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북경원인보다 많이 앞선 시기이다.

 

 

許昌人 화석

 

8-10만년전 인류, 현대 중국인들의 조상으로 추정된다. 하남성 허창시에서 발견되서 허창인이라고 명명되었다. 보통 발견된 지역의 명칭으로 불리운다. 16조각을 복원한 두개 골외에 이것이 발견된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석기, 뼈로 만든 골기등 3만여점의 유물도 함께 발견되었다

 

 

초기 신석기 시대 유물들

 

앙소문화이전의 훨씬 원시적인 문화 중의 하나인 배이강(裵李崗)문화의 석기들. 집터와 토기를 구웠던 구덩이, 농기구와 곡물 가공 도구등이 발견되었다

 

 

紅衣彩陶鉢

 

명칭이 홍의채도발이라고 붙여 있고, 신석기시대 앙소문화(6800-4800년전)라는 설명도 붙어 있다.

중국의 앙소는 하남성 낙양 인근 지역이고, 앙소문화는 대체적으로 학계에서 BC 3500년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책에서 봤는데, 여기서는 더 이전으로 표기되어 있는 점이 달랐다.

채도 논쟁과 '채도의 길'이라는 것이 있는데, 중국의 채도(채색 도자기)가 서쪽에서 전래되었다는 서구 학자들의 주장과 중국에서 자생된 것이라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간의 대립이며, 채도 문제만이 아니라 여러 문물, 문화의 서래설까지 언급되는 중국 문화의 자부심과 관련된 문제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최초의 채도는 BC7000경의 이라크 자모르 채도인데, 중국 채도의 자생설을 주장하던 중국 학자들은 그동안 서아시아와 중국과의 중간지역에 채도 유물이 없지 않냐고 주장하다가 BC 5000년전의 투르크메니스탄 아나우 채도와 신강의 하미 채도가 연이어 발견되면서 난감해 하고 있다(동서 문화교류사의 권위자 정수일교수, 일명 깐수)

 

그런데 이 토기의 시원과 관련해서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책 [총, 균, 쇠]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는 일본의 약 12700년전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 다음이 중국과 블라디보스톡 지역의 토기들이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유럽보다 1천년전인 이유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한다.

즉 1만3천년전에 전 세계 빙하는 급속도로 녹기 시작했지만, 그 전까지 일본은 한국, 러시아 연해주, 중국 남부지방과 연결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문물들이 한반도에서 도래되었다는 점과 일본의 느린 문명 발전과정을 생각하면 일본의 세계 최초 토기라는 점은 이상하고, 언젠가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더 이른 시기의 토기가 발견되지 않을까 이야기 하고 있다.

 

 

용산문화의 도기

 

중국 후기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문화로는 용산문화와 양저문화가 있다. 용산문화는 황하 중류지역의 앙소문화와 황하 하류의 대문구문화를 토대로 발전해 황하 중류와 하류 산동성 일대에 걸쳐 있었다.

농업 생산력의 증가로 인간 사이의 억압과 지배의 새로운 관계인 계급이 출현하고 빈부의 격차, 씨족 내부의 갈등과 권력자가 생기고 타 씨족과의 전쟁도 발생하게 된다. 신을 위한 제단과 의식을 거행하면서 제사장이라는 권력자도 나타나고, 노동력의 차이로 인한 남성 권력의 강화와 여성의 예속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은 발굴되는 묘의 부장품 숫자(부장품 1개의 묘가 있는 반면에 160점의 묘가 있고, 한 사람만의 무덤에 진귀한 보물과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는 점)와 남성 묘의 부장품과 여성 묘의 부장품의 내용 차이, 집터의 규모와 마을의 규모 차이, 성벽의 건설과 성읍도시의 출현등에서 알 수 있다.

용산문화는 국가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언사 이리두(偃師 二里頭) 유적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낙양 부근 언사현에서 발견되었는데 하남 용산문화이후 정주의 二里岡문화 이전의 시기의 문화층을 발견한 것이다.

夏의 유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殷 초기의 유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은 이전 시기의 유적으로 보고 싶은 이유인지 여기 설명은 하나라 유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석기, 토기, 칼, 낚시바늘 등의 원초적인 청동기와 그리고 옥기와 청동 爵(술을 데워서 따르는 기구)도 발견되었고, 다양한 무늬가 그려져 있다. 궁전 터 자리로 보이는 부분도 발견되었다

 

 

하나라 유물이라는 설명이 있다

 

 

鄭州 商城의 지도와 유물

 

 

언사 상성(偃師 商城)

언사 이리두 유적지 부근에서 발견된 언사 상성 유적지

 

 

갑골문자

 

 

갑골 문자

 

하남성 안양현에서 하천이 벌람하면서 갑골의 파편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거북의 배 껍질과 소의 어깨 뼈 부분에 주로 새겨졌고 중국 한자의 원형이며 주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제사를 지낸 후에 불을 놓아 국가의 주요한 일을 결정하거나 길흉을 판단했고, 그 결과를 갑골 위에 기록했다. 이것이 갑골문이다. 현재 16만개의 복사(卜辭)가 있다.

갑골문에는 商이라는 선명한 글자가 나타나있고, 하늘 신과 땅의 신, 조상 신을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은나라는 제정일치의 신권 정치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은나라는 갑골문과 더불어 정교하고 세련된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고, 갑골문과 더불어 은 말 그리고 주나라때 청동기에 새긴 銘文이 문자로 유명하다.

순장과 백성들에 대한 무서운 형벌과 가혹한 수탈도 기록되어 있다

 

 

상나라 청동기의 주요 문양들

 

 

 

 

西周시대의 청동기 유물

 

청동기는 은나라 유물에서 많이 발견된다. 중국 학자들이 하나라의 청동기 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들도 있지만, 은나라때 것들도 많고 특히 주나라때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지고 많이 사용됐다. 처음에는 祭器와 창검과 같은 전쟁도구를 주로 제작하다가 다양한 물품으로 확장되었다 

 

 

천자의 6마리 말 마차의 갱

 

은나라 유적에서 발견되는 殉葬 풍습은 周에서는 무척 많이 발견된다.

말만이 아니라 사람도 많이 같이 묻혔다. 공자도 이 풍습을 훗날 비판했지만, 이 시기는 지배, 억압, 착취 위주의 시대였던 것 같다. 갑골문에 기록된 형벌도 너무 잔인한 것을 보면 공포의 사회였던 것 같다.

이러한 지배와 억압 구조는 시간이 흐르면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포장된다.

후일 유교도 동중서가 한 무제에게 국교로 권유할 때부터 지배계급이 일반 민중들 위에 군림하면서 착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수단이었고, 조선에서도 유교의 역할은 동일했다.

역사는 오늘날의 인권과 민주주의도 긴 시간에 걸친 무수한 피를 흘린 투쟁의 결과임을 말해주고 있다

 

 

회채도호용(繪彩陶胡俑), 낙양시에서 출토된 西晉의 유물

 

한나라이래 주변의 많은 나라들에 대한 영토 확장을 통한 교류와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이루어졌고, 그리고 위 진 남북조시대 동안 중원은 한족이나 소수민족들에게 정치적 중심 지역이면서 이 시기에 남북간의 교류와 전쟁을 통한 문화적 인종적 융합도 이루어졌다. 위의 채색된 토용의 얼굴 모습도 이국적이다

 

 

수, 당 대운하 지도.

 

중원에서 절강성까지의 긴 거리에 수로를 판 것은 강남과의 원활한 교류와 통제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낙양 용문석굴

 

중국 3대 석굴 중 하나. 낙양의 대표적인 유물. 강가의 가파른 석회암 절벽에 10만개이상의 불상과 약 2500개의 비문, 60개 이상의 불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위의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부터 조성되기 시작해서 다시 당나라때 크게 조성되었다.

 

 

당삼채

 

당나라때 대표적인 도자기. 백색 바탕에 주로 녹색, 황색, 또는 갈색, 적색, 남색등의 3가지 색깔의 유약을 입혔다. 낙양과 장안에서 주로 제작되어 묘에 부장품으로 사용되었다.

병, 사발, 물병, 잔이나 남여 인물상, 악사등의 형태, 그리고 말, 낙타, 사자, 새등 여러 형태로 제작되었다

 

 

당나라 현장스님의 이동 경로 지도

 

정주 商城

 

 

정주 시내의 상나라 성의 유적.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다. 꽤 길이가 긴 규모로 남아있다. BC1500년경 이전에 저런 규모의 성을 쌓는다는 것은 동원력이 막강한 강력한 국가 권력의 존재를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