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의 아침
어제 밤에 가본 낙양성이 멀리 보인다
낙양으로 대표되는 중원 지역 역시 북경처럼 최근에 공장들을 이전시키면서 대기 질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지형은 도시와 평원을 산악지대가 둘러싸고 있는데, 북쪽은 황하, 남쪽은 낙수와 이수가 흐르고 서쪽은 진령산맥으로 이어지는 넓은 산악지역이며 동쪽은 평원이다.
도시의 북쪽 구릉이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으로 호칭되는 그 유명한 北邙山이며 역대 왕, 귀족, 명사들의 무덤지대인데, 지금은 논과 목장지대이다.
그리고 동쪽에 정주와 개봉, 서쪽에 서안(장안)이 위치해 있는 중간 지역이다.
중원은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이고, 낙양은 중국 최초의 왕도이며, 서안과 더불어 가장 古都인데 천여년동안 13개 왕조의 도읍이 낙양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낙양시 인근에서 최근에 발굴되고 있는 夏나라 유적지인 언사(偃師) 이리두(二里頭) 유적지의 발견(상나라 초기 유적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다)으로 이곳이 도읍지인 짐심이라는 점이 밝혔졌고, 바로 옆에는 상의 건국자 탕왕이 최초로 건설한 偃師商城 유적지도 발견되어서 이 낙양 일대가 東周까지 포함한 하, 은, 주 삼대의 도읍지임을 말해준다.
周의 동천으로 춘추시대가 시작되면서 동주의 도읍이 된 이래, 전국시대때도 여러 나라의 수도가 되었다가 광무제의 후한때 수도가 되었고, 선비족의 北魏가 孝文帝때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후 한화 정책과 용문석굴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낙양은 동한과 삼국시대 魏나라, 西晉과 북위의 도읍이었을 때 번성한 세계적인 대도시였으나 북위 말기에 전란으로 폐허로 변하기도 했고, 수와 당의 東都로 재건하고 측천무후때 잠시 武周의 도읍이기도 했으며 당말 오대때도 몇 나라의 수도였다.
번성기때 낙양은 인구 백만명에 달했고 실크로드의 출발지와 운하의 교통 요지였다.
그후 송나라때부터 낙양은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잃기 시작했다.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두가지인데, 첫째는 지리적 위치상의 문제가 고려되면서 낙양은 서쪽의 장안과 동쪽의 하북지방 양쪽으로 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중간 지역이어서 동서 양쪽간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 지역이 되고 아울러 어느 쪽으로부터의 진격이 시작되도 우선 점령할려는 요충지가 된다는 문제점이 고려되었다.
둘째는 낙양은 오랜 기간동안 여러 왕조들의 도읍지라서 상대편들로부터 공격을 위한 취약점을 찾는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온 지역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송의 수도는 동쪽인 개봉으로 정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글이 있다.
낙양은 지금 하남성의 성도도 정주에게 내줬지만, 夏, 殷, 周(東周)라는 역사시대 최초 고대 국가의 도읍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언젠가 땅속의 과거 유적지와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고 관리되면 오늘날 서안(장안)과 같은 역사 관광지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거나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西岳 華山
화산시까지 태우고 갈 고속열차. 중국의 가파른 성장을 대표한다. 세계에서 가장 긴 코스의 건설로 높은 기술력에 도달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을 제시하며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
중원은 황하를 낀 넓은 평원지역인데, 흙도 붉은 빛깔을 띤 토지
화산 입구. 화산은 중국 5악 중 서악이다.
5악은 중원을 둘러싼 동악 태산, 서악 화산, 남악 형산, 북악 항산, 중악 숭산인데 위치를 고려해보면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것 같다.
서악은 섬서성 서안 바로 옆의 화산시에 위치해 있고, 그 날카로운 형상과 가파른 산에 매달려 있는 長空棧道도 유명하고 무협지의 배경으로도 유명하다.
화산은 도교의 성지로도 유명한데, 중국의 유명 산, 멋진 산에는 거의 도교사원이 있다. 이는 중국인 특유의 산악신앙과 관련있다.
오랜 기간 동안 지배계급은 유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내세웠지만, 민중은 도교를 숭앙했다.
춘추전국시대의 노자와 장자를 원조로 한 도가사상은 유가처럼 국가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개인 중심이어서 전란이 빈번하고 사회가 불안한 양자강 이남의 육조 사회에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적절했다. 하지만 소극적이고 지극히 탐미적이어서 본격적으로 성숙되지 못했다.
그러나 후한 말기의 민중들 속에서 나타난 태평도와 오두미도의 전통을 이어받은 도가사상의 한 갈래가 동진의 갈홍(葛洪)에 의해서 도교 이론으로 체계화되고 북위의 국교로 채택되었다.
불교는 후한때 들어왔고 남북조시대때 교단과 전파의 체계를 갖추면서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고 당나라때 번성했지만, 결국 도교에 밀렸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고구려의 멸망이후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드높았는데 사대의 기본 이데올로기가 유교여서인지 도교가 들어왔지만 배척되었다
화산을 오르기 위한 엄청난 인파. 기다란 줄을 오랜 시간 기다려 서봉 케이블카를 탄다
서봉 케이블카 출발지점
저 멀리 오성 홍기가 휘날린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
큰 별 공산당을 중심으로 노동자, 농민, 쁘띠브르조아, 민족 자본가계급이 단결하자는 정신은 오늘날 어디로 사라지고..권력의 소수 독점과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부패한 자본주의의 모습만..
프랑스 기술을 들여와서 2-3년전에 새로 건설했다고 자랑하는 고난도의 서봉 케이블카.
약 20분 동안 놀이공원의 청룡열차처럼 아찔하게 스릴 넘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면서 여러 봉우리들을 오르고 내리며 지나쳐 서봉까지 도착한다. 주변 경치와 밑에 풍경도 매우 멋지다
거대한 봉우리에 굴을 파서 만든 서봉 케이블카 정거장
서봉 정상의 모습. 누각과 도교 사원이 있다.
서봉에서 건너편 남봉의 모습이 보인다. 서봉 남봉 동봉 중봉을 순환하고 북봉으로 하산할 예정이다
여러 군데 세워져 있는 화산논검 비석. 무협지에서 무림의 고수들이 화산에 모여 우열을 가렸다는 내용을 기리는 비석이다.
그래서 저렇게 칼을 들고 사진을 찍거나 아예 복장까지 빌려주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화산 남봉 정상석 옆의 조그만 연못. 비가 없는 가뭄때나 홍수때에도 이상하게 저 못은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는다고 한다
화산에서 가장 높은 남봉 정상. 2154.9m라고 적혀 있다
남봉에서 동봉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장공잔도 입구.
줄이 너무 막혀서 그 유명한 화산의 장공잔도를 구경조차 못했다
동봉 가는 길에 건너편 암벽 사이의 가파른 계단길이 보인다
암벽의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니 동봉에 다다른다.
화산이 날카로운 형상의 산이지만, 서울 북한산을 오르던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등산이 가능하다. 단, 새벽부터 서둘러야 케이블카로 오르고 내리는 수많은 인파들로 인한 대기 시간을 고려한 등산이 가능하다
동봉 정상
동봉 건너편 암벽의 긴 잔도. 화산에도 다양한 코스가 있다
중봉 정상. 도교 사원이 있다
그 유명한 북봉에서 중봉 가는 칼바위 능선 길이 보인다
칼바위 능선 길의 시작지점. 가파른 능선 사이의 계단길인데 양쪽은 천길 낭떠러지이다.
이 칼 능선에는 당나라 韓愈가 겁쟁이로 놀림받게 된 일화가 있다
칼바위 능선이 흐릿하게 보인다
등산로 중간에 짐꾼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돈을 구걸하기 위한 것이다
가파른 화산에서 저 무거운 짐을 나르고, 노래를 하고 살아가는 유형도 다양하다.
산 위 하산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긴 줄 옆에도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구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의 명산마다 보이는 절벽에 쓴 수많은 글씨들. 오래지 않은 시기에 쓰인 글자들도 많은데 바위에 굵은 쇠줄을 기다랗게 박거나 암석을 깨서 끊임없이 만든 계단길들과 심지어 평지에까지 깔은 돌길들.. 자연을 보호하려는 개념이 희박하다
건너편 북봉과 북봉 케이블카 정거장
북봉에서 중봉 가는 칼날 능선 길. 중간에서 능선 위로 올라선다
중봉, 남봉등이 보인다
북봉 케이블카. 순간적으로 빠르게 태워 계속 운송한다
등산 코스에 불이 켜진 멋진 모습. 하산 케이블카를 오랫동안 기다리는 중에 본다. 오후 7시까지만 산행이 허용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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