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

중국 중원의 산과 사람들 -1. 운대산과 홍석협 / 정주, 낙양

초록숲12 2018. 11. 2. 04:48

 

하남성, 정주, 은나라

 

 

 

 

 

 

정주 시내공원에 세워진 商 글자. 옛날 이 지역에 상나라(은나라)가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 오늘날 이렇게 현대화된 대도시인 鄭州河南省의 성도이다.

 

하남성은 중국 문명, 즉 황하문명이 시작된 대표적 지역이다. 문명 culture라는 단어가 '밭갈기'에서 비롯된 단어라는 점에서 농경문화가 최초로 시작되었을 이 지역이 황하문명의 발상지로 여겨진다.

최초의 유적인 殷나라 유적지 은허와 역사시대의 기준이 되는 문자 기록인 갑골문이 이 지역 安陽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시경]이나 사마천의 [사기] 역시 하나라가 이 지역 뤄양(낙양) 지역의 씨족국가임을 전하고 있다.

상나라는 商이라는 성씨의 강력한 씨족이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인데, 은나라와 은허라는 말이 사용되는 이유는 상나라가 여러번 도읍지를 옮겼는데 그 마지막 지역이 殷이어서 생긴 명칭이다.

 

국가는 생산력이 발전하여 잉여생산이 가능해지면서 계급의 형성과 함께 나타나며 아울러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중국에서는 후에 유교)와 형벌이 자행되는데, 은나라도 말기의 武乙,紂王때에는 가혹한 전제군주로 잔혹한 형벌(갑골문의 기록)을 통해 지배함으로써 반감을 일으켜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하남성은 고대 유명 도시인 낙양, 개봉, 정주, 안양을 포함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낙양은 수많은 나라들의 수도였고 개봉 역시 송(北宋)의 수도였고, 정주 역시 상나라 건국 후의 도읍지이고 周나라의 주요 지역이였으며 춘추전국시대때는 鄭나라와 韓나라 지역이었다.

아울러 이 지역은 문명의 시작뿐만 아니라 북경원인과 비슷한 시기인 약 50만년전의 南召猿人도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현생인류 이전의 고대 인류가 일찍부터 이 지역에서 활동했다.

 

운대산


 

 

 

태항산맥 남쪽에 위치해 있고 愚公移山이란 말이 나온 장소. 정주와 낙양시의 북쪽 焦作시 부근에 위치한 유네스코 지정 지질공원이다

 

 

 

홍석협

 

 

홍석협은 붉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멋진 협곡이다

 

 

 

 

 

 

 

 

 

 

 

 

 

 

 

 

 

운대산 정상. 수유봉

 

 

운대산 정상 수유봉의 모습

 

 

 

 

운대산 정상의 사원에서 내려다본 산의 모습

 

 

운대산 정상 표지석

 

 

 

 

 

 

 

효문제

 

 

 

의 호텔에서 본 북위 孝文帝 그림.

 

위진남북조시대의 오랜 분열을 정리하여 북조의 통일 왕조를 세운 北魏의 대표적인 황제.

사실상 최초의 토지제도인 균전제를 만들어 토지의 국가 소유와 농민들에게 지급 그리고 일정한 비율의 세금을 거두어 들임으로써 전쟁 때문에 유민이 된 농민들을 정착시켰다.

아울러 안정적인 세제를 통해 재정을 안정시키고 발전을 이룩한 인물. 균전제는 수, 당으로 전승되었다.

북위는 도교를 국교로 삼았음에도 불교의 호국적인 성격이 지배층의 호응을 얻어 장려되었다.

그리고 북위는 오늘날 중국의 3대 석굴 중 2개, 즉 운강석굴을 5세기에 大同에 완성하고 다시 용문석굴을 낙양에 천도한 후 만들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미켈란젤로가 성시스티나성당의 천장 조각을 완성하기 1000년전에 이러한 거대 조각상을 만들었다는 점은 동양 문명이 서양문명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점과 한족들이 미개하다고 멸시한 오랑캐들 역시 결코 한족에 떨어지지 않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송나라처럼 허약한 왕조만 예외적이었을뿐, 내부의 지속적인 싸움을 통해 통일 왕조를 건설하면 반드시 주변 국가들을 침공하여 괴롭히는 패권주의적 행태를 보여왔는데, 한반도를 비롯한 오늘날의 베트남지역이나 서쪽 신강과 타클라칸사막 일대, 티벳지역등이 시달렸고, 한 무제와 수 양제, 당 태종, 원의 쿠빌라이, 명 영락제, 청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등이 모두 그러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이 북위의 효문제만 북쪽 지역에 통일 왕조를 건설한 후에도 우리의 고구려를 인정하고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고, 장수왕이 죽었을 때에는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낙양 성

 

 

 

 

 

 

냑양 성의 성문인 麗景門

 

그 유명한 낙양 성. 수나라때 건설되었는데 이 문을 지나면 안쪽에 조그만 광장이 있고, 다시 이 정도 규모의 성루을 갖춘 문이 또 하나 있는 이중 성문 구조이다. 낙양성은 북위가 수도를 옮겨 오면서 지어졌으나 이 수나라 성은 서쪽 10리에 새로 지어진 것이고, 낙양은 수, 당때에는 東都로서의 위치를 가졌었다.

낙양은 오랜 역사를 가진 古都인데, 중국 최초의 불교 사원인 白馬寺가 있고 그 부근에 漢과 魏의 도읍인 洛陽故城이 든든한 토성과 대궐 유적이 여전히 남아 있고, 삼국시대때는 동탁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기도 했고 중일전쟁때는 시가지에서 전투가 치러지면서 또 다시 파괴된 불행한 역사를 안고 있다.

 

 

 

 

두번째 성의 누각. 성안의 구 시가지 동네는 꽤나 번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