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

안산 산행...백로처럼 성벽에 앉아 싸움 구경을 하다

초록숲12 2020. 7. 25. 22:36

안산 옆 인왕산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무악재는 옛날에는 말 한필 겨우 다니는 하늘로 올라가는 길목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좁고 높은 고개였는데 1960년대까지 여러 차례 깍이고 넓혀졌다고 한다

 

안산(동봉) 정상
북한산
북한산과 인왕산
안산(동봉) 정상 봉수대

조선 태조때부터 안산의 동봉과 서봉에 봉수대를 만들어 매일 밤 봉홧불을 올렸다. 아무 일이 없으면 봉홧불 하나, 외적의 침입은 2개, 가까이 올수록 3-4개, 전투가 발생하면 5개, 그리고 이 불을 신호로 남산 봉화대로 연결됐다.

외적의 국경 침입과 전쟁 발발을 알려주는 중요한 전략적 장소인 이 곳은 서인들이 광해군을 제거한 인조반정이후의 이괄의 난때 그 한계를 보여주었다.

봉수대를 지키는 봉수군만 포획하면 거짓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 관군은 그 점을 이용하였는데,

즉 이괄은 한양 점령후 관군의 안산 재 점령 사실을 뒷날에야 알게 된다.

이런 점은 그후 병자호란때도 동일했다.

이괄은 인조반정때 함경도 병마절도사로서 가장 많은 물리력을 이끌고 내려와 반정을 성공시킨

중심 인물인데,

전두환 12. 12 쿠데타처럼 전방 부대를 이끌고 내려온 놈들의 원조 역할을 했는데도 공적을 나누는 논공행상 과정에서 대접을 소홀히 받고 다시 평안도 전방으로 배치되었고 심지어 아들이 역모 혐의를 받자 다음 해에 이번에는 더 많은 1만의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한양을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인조는 후일의 강화도, 남한산성 피신처럼 임란때 선조만큼이나 도망에는 일가견이 있어 공주성으로 도주하는데, 얼마나 민심이 안좋은지 한강에서 백성들은 배를 숨기고 내주지 않았다.    

인왕산 뒤로 낙산, 아차산 줄기가 보인다

 

이화대학과 한강
일제때 서대문 형무소,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절 서울 구치소
정상에서 살펴보니 당시 이괄의 반군이 진입한 두개 코스와 관군의 점령지를 고려하면 이곳이 안산 전투의 장소로 추측된다

이괄은 관군의 세력이 적다는 것을 알고 승리를 자신해서 도성의 백성들에게 싸움 구경을 하라고 방을 써붙였다.

백성들은 인왕산 성벽에 백로처럼 올라 앉아 전투 구경을 한다.

이괄의 반군은 숫적 우위와 바람의 도움으로 처음에는 승기를 잡았으나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흙먼지를 맞으며 밀리다가 결국 패하게 된다.

이후 동봉은 승전봉이라고도 불린다. 

조선때 사대주의의 상징 모화관 자리

중국의 사신들을 환영하던 慕華館. 이름부터 치욕스럽다.

그리고 나 혼자 살겠다고 의주로 도망쳤던 선조가 大明會典 수정판에 이성계 가계를 수정하는 일에 혼신을 다해 매달리고 결국 수정본이 나오자 너무도 기뻐 그 수정본을 가지고 돌아온 사신들을 한걸음에 맞이하러 달려나온 치욕스런 宗系辨誣 사건의 장소. 

청일전쟁으로 청이 패한 다음 해에 모화관은 문을 닫았다.

독립문 뒷쪽의 조그만 못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독립문 자리 건너편쪽에 커다란 못인 西池가 있었다. 그 자리를 매워 조선의 군영 그리고 후일 일본 공사관이 세워져 1882년 임오군란때 구식 군대가 창덕궁과 더불어 공격하면서 다시 일본에게 제물포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의 구실을 주게 되었다.

일제때 투옥된 독립투사들의 옥바라지를 한 가족들이 몸을 누이던 형무소 건너편의 골목 일대를 기념하는 건물 같다

 

사대주의의 표상 영은문 자리에 세운 독립문

독립문 바로 앞 기둥이 부숴버린 영은문의 기둥.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아관파천과 그리고 러시아의 주도로 이루어진 프랑스, 독일등의 3국 간섭으로 조선 땽에서의 러시아와 일본의 힘의 균형 상태에서 서재필등의 주도로 만들어진 독립협회가 迎恩門을 부수고 독립문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