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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회주의: 인물(1)/ 꺼지지 않은 불꽃, 송산 김명식

초록숲12 2017. 2. 6. 17:57





진보평론  제2호

박종린(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조선 초유의 사회주의재판

1922년 12월 26일 오전 10시 30분.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
노무라 재판장과 오하라 검사의 입석으로 신생활사 필화사건 제1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조선에서 처음 열리는 사회주의자 공판을 보기 위해 살을 에는 겨울 바람을 맞으며 아침 7시부터 방청권을 얻기 위해 운집했던 600여명의 군중들로 방청석은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초만원이었다.
피고인석에 출석한 여섯 사람.
신생활사의 박희도, 김명식, 신일용, 유진희와 조선노동대회의 김사민, 이항발.
이들은 1922년 11월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된 ꡔ신생활ꡕ 11호에 게재된 김명식의 「로서아혁명 오주년 기념」, 신일용의 「오년전의 금일을 회고」, 유진희의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 이항발의 「자유노동조합 결성의 취지」 등의 글이 ‘적화사상’을 선전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이 날 공판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6명의 피고에 대한 1차 심리를 모두 마친 노무라 재판장은 치안에 방해가 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차후 신생활사 필화사건 공판의 방청금지를 선언하고 모든 방청인과 기자들을 퇴정시켰다. 이 날 공판에서는 단연 방청객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이가 있었다. “공산주의에 찬성하는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마르크스의 사상에 공명하며 연구하고 찬성하오”라고 당당히 답하며, 공판을 사회주의사상의 선전장으로 활용한 신생활사의 주필 송산 김명식(松山 金明植)이 바로 그였다.


송죽매결의와 일본유학

김명식은 1891년 9월 당대 “제주도의 관문”으로 불린 전라남도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현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면 조천리)에서 대대로 조천에 세거한 김해 김씨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김응전과 종조부 김응빈은 각각 해미군수와 제주판관을 역임하였고, 그의 부친 김문주도 정의군수를 역임하는 등 김명식의 집안은 ‘조천김씨’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당대 제주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특히 김응전과 김응빈은 제주에 유배된 정치가․문인들과 제주지역 유림들이 조직하여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한 귤원시회(橘園詩會)의 핵심멤버로, 김윤식과 박영효 등 개화파가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신사상의 수용에 적극적인 이들이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아래서 김명식은 1908년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의 제주지회가 설립되자 고향 후배인 김문준과 함께 입회하였다. 그리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하여 한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또한 동향 후배인 고순흠과 함께 비밀결사체인 대동청년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보성중학교 교장이던 박중화와 남형우가 주도한 이 단체는 신백우․김동삼․윤현진․서상일․이수영&# 8228;장건상․오상근․김약수․김두봉․이� 慢�․신채호 등이 참가한 대규모의 운동조직이었다. 그러나 김명식의 서울 생활은 오래지 않았다.

1910년 합방이 되자 학교를 자퇴한 김명식은 향리인 조천으로 낙향하였다. 낙향한 김명식은 조천에서 김문준과 함께 종교단체가 운영하던 독서회관의 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동향의 죽암 고순흠(竹岩 高順欽), 매원 홍두표(梅園 洪斗杓)와 함께 일생을 조국의 해방을 위해 바칠 것을 맹세하는 송죽매결의(松竹梅結義)를 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로 신학문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것을 다짐하고 홍두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 후 김명식과 홍두표는 와세다대학과 메이지대학에 입학하였고, 고순흠은 상경하여 경성법학전수학교에 진학하였다.

도일 후 1915년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한 김명식은 1918년 졸업할 때까지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하였다. 당시 와세다대학에는 장덕수, 신익희, 양원모, 최팔용 등의 유학생들이 재학중이었고, 김명식도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의식을 폭을 확대시켜갔다. 그 과정에서 김명식은 1916년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체인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간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학우회의 간부로서 기관지 ꡔ학지광(學之光)ꡕ에 몇 편의 시와 논문을 기고하기도 하고, 신입생을 대상으로 애국을 주제로 강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김명식은 향후 그의 삶의 궤적을 결정짓는 중요한 한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1916년 봄 동경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이 바로 그것이다. 신아동맹단은 조선, 중국, 대만의 청년들 40여명이 일본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서로 도울 것과 민족평등, 국제평등을 실현할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한국인으로는 김명식을 비롯하여 장덕수․김철수․정노식․윤현진․김효석 등 10여명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창립대회에서 아시아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시아를 세우는데 전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고 이를 위해 조선, 중국, 대만 이외의 아시아 약소민족의 동지들을 가입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사회주의자로, 사회혁명당과 고려공산당에서의 활동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김명식은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 창립대회에 참석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주의자로의 ‘기나긴 여정’에 참여하게 된다. 종래 존재하던 신아동맹단이 1920년 6월 경성에서 제5차 대회를 개최하면서 활동무대를 국내로 이전하고 단체의 명칭을 개칭한 것이 사회혁명당이었다. 장덕수․김철수․최팔용․이봉수․주종건&# 8228;김명식 등 30여명이 참석한 창립대회에서 이들은 ‘일본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그 다음 사회주의 국가를 세울 것’을 천명하였다.

1921년 5월 20일 상해에서 조선, 일본, 중국, 노령의 대표자 1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창립대회에 사회혁명당은 각 지역을 대표하여 김철수․이봉수․주종건 등 8명을 파견하였다. 창립대회에서는 위원장에 이동휘, 비서부장에 김립, 중앙위원에 김철수․최팔용․장덕수 등 12명이 선임되었고, 김명식은 유진희․한위건․장덕수․이봉수․최팔용 등과 함께 9명의 내지 간부 가운데 일인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주종건․유진희․윤자영과 함께 기관지 주간이 되었다. 이때 사회혁명당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국내지부로 자신의 위상을 전환하였다.
상해파는 조선청년회연합회와 조선노동공제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했으며, 국내간부 가운데 장덕수와 김명식은 동아일보사 주필과 논설반원으로 ꡔ동아일보ꡕ의 중심 논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시기 김명식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사회혁명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노선에 입각해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비합법 공산주의단체에 참여하면서 그 조직의 노선을 합법적인 공간에서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조선노동공제회의 발기인이자 의사원이었고,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집행위원이자 고려공산당의 프랙션이었다. 김명식은 뛰어난 웅변으로 대중단체의 강연회를 통해 신사상을 소개하고 신사회 건설을 역설하였다. 또한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 ꡔ공제ꡕ, 조선청년회연합회 기관지 ꡔ아성ꡕ, ꡔ동아일보ꡕ 등의 지상에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다수의 글을 기고하였다. 그 가운데 1921년 6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61회에 걸쳐 ꡔ동아일보ꡕ에 연재한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연재물은 한국에 공개적으로 소개된 최초의 레닌의 일대기로 일반인들이 레닌과 러시아혁명을 이해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윤식사회장 찬반논쟁과 신생활사의 조직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민족혁명을 수행한 다음 공산주의혁명으로 이행한다는 '연속혁명론'을 견지하면서, 이 시기 당면 혁명을 민족혁명단계로 파악하여 민족주의세력과의 통일전선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들은 혁명의 주체세력, 특히 노동계급의 역량이 미약하다고 파악하였고, 이러한 판단 아래서 민족 내부의 투쟁을 지양하고 민족의 총체적 역량을 강화하는 가운데 노동계급의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국내 책임자였던 장덕수는 동아일보사를 중심으로 김윤식사회장을 주도하였다. 이에 반대한 김명식은 유진희 등과 좌파그룹을 형성하고 장덕수와 조직적인 분리를 통해 신생활사(新生活社)로 결집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이 김윤식사회장이었다.

1922년 1월 21일 김윤식이 88세를 일기로 죽자 동아일보는 김윤식을 ‘우리 민족과 사회의 원로’이자 ‘조선의 문장’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언론계․교육계․종교계․법조계 등의 주요 인물들의 발기로 ‘김윤식사회장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박영효와 이용직을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하고 사회장의 일체 사무를 관장할 실행위원 10인과 장례위원 87인으로 구성된 김윤식사회장위원회는 송진우․김성수․이상협․장덕수․김동성 등 동아일보사 관계자들이 중심이 되어 고원훈․임경재․최두선․정대현․최규동 등의 학교장과 최진․이승우․박승빈 등의 변호사, 윤치호․이상재 등 YMCA 관계자 등이 다수 포진하였는데, 특히 동아일보사의 지원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바로 이점이 다른 공산주의단체들로 하여금 김윤식사회장이 동아일보사와 장덕수를 중심으로 하는 상해파가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전개하는 책동으로 비춰지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1월 27일부터 표면화 된 김윤식사회장에 대한 반대의지는 27일과 28일 양일간 회집을 통해 ‘김윤식사회장반대회’로 결집되었다. 이후 두 차례에 걸친 반대운동 대강연회에서는 창간이래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하면서도 민중의 여론을 무시하고 있는 동아일보사를 집중적으로 성토한 후 동아일보 비매동맹회를 조직하였고, 사회장 발기를 주도한 동아일보사의 송진우․장덕수․이상협의 사직을 공개적으로 요구하였다.
또한 2월 2일에는 ‘재동경신인동맹’의 명의로 동우회 이사장 황석우, 코스모스구락부 조선부 간사 원종린, 흑도회 간사 박열, ꡔ대중시보ꡕ 주간 김약수, ꡔ청년조선ꡕ 주간 정태신, 무산자동지회 위원 김한․원우관 등이 연서한 「민중의 격(檄): 소위 김윤식사회장이란 유령배의 참칭 사회장을 매장하라」라는 글이 발표되면서 문제는 단순한 사회장의 찬반문제가 아니라 ‘민중의 적’을 타도하는 문제로 나아갔다.

이러한 와중에서 김명식은 동아일보 논설반에서 퇴사하여 ꡔ신생활ꡕ을 조직하였다. 그는 김윤식사회장 자체에 대한 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장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세력들의 운동양태, 특히 기관으로써의 동아일보사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동아일보사와 김윤식사회장을 주도한 장덕수 등을 분리하여 사고하면서 사회장을 주도한 이들과 그들이 주도한 사회장 자체에는 비판적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개입된 ‘기관’으로써의 동아일보사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 않았다. 이는 상해파의 분열 속에서 장덕수를 중심으로 하는 상해우파에 대한 비판과 유력한 조선인 기관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동아일보사에 대한 비판 자제라는 양면을 적절하게 사고한 바탕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이 견해는 사회장을 주도한 장덕수 등의 상해우파나 사회장 반대운동을 전개한 기타 공산주의단체의 견해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김윤식사회장을 계기로 장덕수 중심의 문화운동을 비판하고 “평민문화의 건설을 제창”하는 ‘신생활사그룹’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사회주의자들이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는 김명식이 서 있었다.

김명식은 1922년 1월 15일 무산대중을 개조하고 혁신한다는 취지 아래,박희도․이승준․이병조․민관식․이� 捐�․김원벽․원한경․이강윤․강매․ 백아덕 등과 함께 신생활사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해 3월 ‘신생활을 제창함’․‘평민문화의 건설을 제창함’․‘자유사상을 고취함’이라는 주지 아래 순간으로 ꡔ신생활ꡕ을 발행하였다. ꡔ신생활ꡕ의 전체적인 논조는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비판과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선전으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맑스주의와 국제노동운동사․러시아혁명사에 대한 소개와 민족개량주의에 대한 비판에 주력하였다.

1922년 6월부터는 월간으로 발행되던 ꡔ신생활ꡕ은 그 해 9월 ꡔ개벽ꡕ, ꡔ조선지광ꡕ, ꡔ신천지ꡕ 등과 함께 신문지법에 의한 발행허가로 시사평론이 가능해지자 제11호부터는 주간으로 발행되었다. 김명식을 주필로 하는 ꡔ신생활ꡕ의 편집진으로는 신일용․이성태․정백․유진희 등 당대의 저명한 사회주의자들이 기자로 참여하고 있었다.

김명식은 ꡔ신생활ꡕ에 송산, 솔뫼, 나산(拏山) 등의 필명으로 다수의 글을 발표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의 선전에 주력하였다. 또한 신생활사에서 활동하던 1922년 3월에는 조선청년회연합회의 현대총서 1권으로 ꡔ신개인 신국가 여명기ꡕ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그 해 8월에는 신생활사 출판부에서 ꡔ노국혁명과 레닌ꡕ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사회주의사상의 대중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사회주의 논객으로

1923년 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신생활사 필화사건으로 징역 2년을 언도 받은 김명식은 그 해 4월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형무소에서의 가혹한 노역과 말라리아에 의한 늑막염과 폐병의 발병으로 사경을 헤매던 김명식은 7월 26일 형 집행정지로 출옥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얻은 병의 후유증으로 김명식은 청각을 잃고 오른쪽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신체장애자가 되었다. 출옥 후 서울의 각 병원을 전전했으나 계속되는 건강악화로 인해 사회활동을 전면 중단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가세는 극빈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었다.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김명식은 1924년 11월 생활고와 병마와 싸우는 자신의 심정을 술회한 「병상영(病床咏)」과 「빈민한(貧民恨)」이라는 두 편의 한시를 ꡔ동아일보ꡕ지상에 발표하였다. 이후 투병생활의 와중에서도 ꡔ개벽ꡕ과 ꡔ조선지광ꡕ에 당대 사회운동과 관련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몇 편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건강의 악화로 인해 김명식은 1928년 3월 병의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이 밀집한 오사까에 정착한 그는 병 치료와 함께 재일조선인 노동운동에 대한 지도를 병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1930년 6월 17일 다시 검거되어 오사까형무소에서 신생활사 필화사건의 잔여 형기를 복역하게 되었다. 그러나 건강 악화로 인해 다시 석방되어 치료를 받는 등 계속되는 병마와의 투쟁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1931년부터 향리인 제주로 낙향하는 1940년까지 김명식은 오사까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악화된 건상상태와 계속되는 일제의 회유와 압력 속에서도 송봉우가 주재하던 ꡔ비판ꡕ, 김동환이 주재하던 ꡔ삼천리ꡕ, 동아일보사의 ꡔ신동아ꡕ․ꡔ동아일보ꡕ, 조선일보사의 ꡔ조광ꡕ․ꡔ조선일보ꡕ 등의 지상에 당대 사회운동, 민족문제, 국제정세, 정치론 등에 대해 사회주의자로서의 자신의 견해를 밝힌 60여 편의 논쟁적인 글들을 기고하였다. 또한 1936년에는 삼천리사에서 자신의 정치론과 국제정세관을 집약한 ꡔ독재정치와 의회정치ꡕ라는 책을 출간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1935년 한 월간지의 설문에 답한 김명식의 답변에서 이 시기 그가 갖고 있던 의식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즉 그는 유사이래 가장 뛰어난 정치가와 철학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각각 레닌과 맑스를 들고, 미래에 대한 사랑을 그 선정 이유로 이야기하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김명식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이론전선의 전초에서 적에게 맹탄을 보낼 투사의 멤버”이자 “조선 맑스주의자의 한사람”이자 안재홍과 더불어 “당대 최고봉의 논객”이라는 평이 주류를 이루었다.

김명식은 ꡔ삼천리ꡕ 1940년 6월호에 「폴란드흥망사(波蘭興亡史)」라는 글을 기고한 것을 마지막으로 향리인 조천으로 낙향하였다. 낙향한 그를 괴롭힌 것은 감옥생활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한 건강의 악화와 계속되는 일제의 압력이었다. 일제는 낙향한 김명식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계속되는 창씨개명에 대한 압력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김명식은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김명식’이라는 이름 석자를 간직한 채, 쉰 세 해의 짧지만 파란 많았던 생을 향리인 조천에서 마감하였다. 때는 1943년 5월 14일 오후 7시였다.

평생을 사회주의자로서 민족해방을 위해 일제와 직․간접적인 투쟁으로 일관한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일본이 망할 때까지 사망신고를 하지 마라”였다고 한다.
 

2003-02-16 16:20:07